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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이 만든것도 아닌데 진시황이 만든 것처럼 중국이 거짓말 하고 있는게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병마용갱이죠. 병마용갱의 엄청난 규모나 이런것만 보면 진시황이 만들었다고 하면 그냥 그런가보다 생각하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너무 명백한 이유가 두가지가 있습니다.

 

병마용갱이 진시황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를 든 것을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찾을 수 있습니다만 저는 딱 두가지만 이야기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재는 사마천이 쓴 사기에 이 병마용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사기뿐만아니고 어떤 문서에서도 병마용갱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하면 진시황에 대한 기록은 사기외에는 전무하다는 것이죠. 늘 진시황에 대해서 얘기할때는 사기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야기하다가 뜬금 병마용갱은 사기를 무시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겁니다. 

 

사마천이 진시황이 병마용갱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사기에 남기지 않았을리가 없겠죠. 이것이 병마용갱이 진시황의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이유입니다.

 

더구나 사기에는 진시황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진시황릉이 어떻게 지어졌다는 것이 묘사돼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병마용갱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명백히 병마용갱이 진시황의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사기에 나와 있는 진시황릉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시황이 즉위하자 바로 여산에 무덤을 축조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천하를 합병한 다음에는 천하에 노역을 위해 70여 만 명을 투입하여 우물 셋 깊이만큼 파고 곽에 이르도록 구리 녹인 쇳물을 붓고 궁궐의 모습, 백관 기이하고 진귀한 기물들을 옮겨 가득 채웠다.

 

장인에게는 화살이 발사되는 기관을 만들게 하여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발사되게 했다. 수은으로는 수많은 하천과 강 그리고 바다를 만들어 기계장치로 계속 흐르도록 했다. 위에는 천문도를 갖추고 바닥에는 지도를 갖추었다. 인어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오래도록 꺼지지 않게 했다.

 

2세(호해)는 '선제의 후궁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들은 내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며 모두 따라 죽게 명령하니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장례가 끝나자 누군가 장인들이 기관을 만들고 기물을 옮긴 자들도 이를 다 알고 있으니 귀한 기물들이 빠져 나갈 수 있다고 했다. 큰일이 끝나고 기물들을 다 넣자 가운데 문을 폐쇄하고 바깥문도 내려 장인과 기물을 운반한 자들을 모두 나오지 못하게 했다. (무덤은) 풀과 나무를 심어 산처럼 만들었다."

 

두번째는 아래 사진을 보겠습니다.

 

왼쪽에 진시황릉이 있고 그 오른쪽에 병마용갱이 있습니다. 병마용갱은 진시황의 사후에 그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왜 저쪽에 있는거죠? 더군다나 병사들이 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중국의 저 시대 문화상 남이나 북쪽에 있어야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당연히 진시황의 사후를 위해 지어졌다면 진시황릉의 무덤 앞이거나 최소한 장원(사진의 붉은 선)안에는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사례는 중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후의 세계를 위해서 지어졌는데 왕릉과 1km 이상 떨어진 곳에 지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자세히 보면 왕릉과 직선도 아니고 비스듬하게 오른쪽 위에 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시황릉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 릉이 진시황릉이라면요.

 

그리고 1호갱의 위쪽에 2호갱 그 옆에서 3호갱이 발견됩니다. 진시황릉을 지키려고 지어졌다면 그런 말도 안되는 배치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혹자는 병마용갱이 동쪽에 있는 이유를 진나라가 서쪽에 있으니 동쪽에서 오는 적들을 막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이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립니까? 그러면 만리장성은 왜 북쪽에 만들었나요?

 

통일 진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적은 북쪽의 흉노였습니다. 그런데 동쪽의 적을 막으려고 했다구요? 웃겨서 쓰러질 지경입니다.

 

세번째는 병마용갱에 기마병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시황의 통일을 이끌었던 진시황의 군대가 기마병 위주였을 것이라는 전제에 의한 것이었는데 사기의 여기저기를 찾아봐도 진나라의 군대가 기마병 위주였다는 기록이 없었습니다. 기마병이었을 수도 있지만 기록이 없어서 이 부분은 좀 애매해졌습니다. 

 

병사들이 20만이니 60만이니 하는 기록은 있는데 기마병이 몇명이고 보병이 몇명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기때문에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영정이 집권하기 전에 소양왕 47년에 왕흘이 조나라와의 전투에서 이때 총 2만5천명과 기병 5천명이 전투에 참여한 기록은 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때 분명 기마병이 있었을텐데 통일 전쟁에서 기마병이 주력병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어서 이부분은 빼도록 하겠습니다.

 

" 보루가 굳게 막으니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진나라 복병 2만 5천 명이 조나라 군대의 후방을 끊고, 또 5천 명의 기병 한 부대가 조나라 군대와 보루 사이를 끊으니, 조나라 군대는 둘로 나뉘고 보급로도 끊어졌다." - 백기왕전열전

 

병마용갱에 기마병이 없다고 하니 혹자들은 무슨 소리냐 기마병이 있다고 하는데 1호갱엔 없습니다. 1호갱이 가장 크니까 당연히 1호갱에 있어야 겠죠. 보병 앞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2호갱에선가 발견된 기마병의 모습은 참 실망스럽죠. 기마병인지 마부인지 분간이 안되는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천하통일에 앞장섰다고 얘기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드나봅니다.

 

어쨌든 1호갱 선두에 기마병이 없어서 진시황의 병마용갱이 아니라는 주장은 당분간 보류 하겠습니다. 이미 첫번째와 두번째 증거만으로도 병마용갱이 진시황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네번째는 그냥 제 추측입니다만 중국 정부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그런거에 능숙한 자들이라서요. 왜냐하면 진시황릉을 발굴하다가 중단하고 말았죠. 그 이후로도 발굴을 안하고 있습니다. 언제할지 기약도 없죠. 여러가지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만.

 

저걸 잠깐 파보니 무언가 말도 안되는 것이 막 쏟아져 나온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저게 진시황릉이 아닐수도 있구요. 그렇게 되면 그나마 진시황 근처에 있다고 병마용갱이 진시황의 것이라고 우기던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죠.

 

릉을 파보면 분명 거기에 누구의 릉이라고 써져 있었을 겁니다. 근데 진시황이 아니고 떡하니 누군가 다른 사람의 릉이었거나 아예 릉이 아니고 그냥 산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파봤더니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죠.

 

왜 이런 의심을 하냐하면 중국이 진시황릉을 이제서야 발견한 이유가 그것이 그냥 산인줄 알았다입니다. 이게 왜 말도 안되는 소리냐 하면 2천년전에 쓰여진 사마천의 사기에 진시황릉을 어떻게 지었고 어디에 지었고 또 어떤 모양이었는지가 나옵니다.

 

" 2세(호해)는 '선제의 후궁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들은 내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며 모두 따라 죽게 명령하니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장례가 끝나자 누군가 장인들이 기관을 만들고 기물을 옮긴 자들도 이를 다 알고 있으니 귀한 기물들이 빠져 나갈 수 있다고 했다. 큰일이 끝나고 기물들을 다 넣자 가운데 문을 폐쇄하고 바깥문도 내려 장인과 기물을 운반한 자들을 모두 나오지 못하게 했다. (무덤은) 풀과 나무를 심어 산처럼 만들었다."

 

산처럼 만들었다고 나온다니까요. 그런데 이제와서 그게 그냥 산인줄 알았고 진시황의 무덤인줄 몰랐다는건 말이 안되죠. 이미 2천년전에도 각종 희귀한 보물을 가득 넣어서 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써져 있었으니 그동안 진시황이 도굴 당하지 않고 산 모양 그대로 남아있었다는건 믿기 어렵습니다. 그 위치도 "여산"에 지었다고 친절히 적혀 있습니다.

 

아무튼 네번째는 그냥 제 상상입니다. 재미로만 봐주시구요. 분명한건 첫번째와 두번째 증거입니다. 절대 진시황의 병마용갱일리가 없습니다.

 

다섯째는 최근에 든 의심입니다만 사기에 보면 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 2세(호해)는 '선제의 후궁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들은 내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며 모두 따라 죽게 명령하니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장례가 끝나자 누군가 장인들이 기관을 만들고 기물을 옮긴 자들도 이를 다 알고 있으니 귀한 기물들이 빠져 나갈 수 있다고 했다. 큰일이 끝나고 기물들을 다 넣자 가운데 문을 폐쇄하고 바깥문도 내려 장인과 기물을 운반한 자들을 모두 나오지 못하게 했다."

 

분명 순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게 왜 병마용갱과 관련이 있냐면 진시황이 순장을 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을 묻는 대신에 병마용갱을 만들었다고 얘기를 했었다는겁니다. 순장을 해야 하는데 순장은 사람을 진짜로 죽이는 거니까 대신 사람 모양을 한 병마용을 만들어서 묻었다는 것인데 사기에는 순장을 했다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러니 앞뒤가 안맞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병마용갱에서 "여불위"의 이름이 나왔으므로 진시황의 것이 맞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불위는 기원전 235년에 사망합니다. 왜 사망하냐면 그가 천거한 "노애"가 난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노애는 사지가 찢겨 죽었고 여불위도 그 책임을 물어 귀향 갔다가 거기서 자결합니다. 자결을 안했다면 결국 진시황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반역을 일으켰던 자의 이름이 남아있다고 진시황의 것이라는게 말이 되나요?

 

여불위가 병마용갱에 참여했다는 기록도 없거니와 실제로 했다고 해도 그의 자취는 모조리 없애야 할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자입니다. 그런자의 이름이 남아있다고 진시황의 것이 맞다고 우기는 것이 반대로 절대로 진시황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분명 여불위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죠. 혹여 비슷한 이름이 나왔다고 해도 동명이인이거나 다른 이름을 여불위의 이름이라고 우기는 것이겠죠.

 

그렇다고 진시황릉이 고구려의 왕릉이라거나 동이족의 릉이거나 진시황이 동이족이었다거나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저도 그런말은 믿지 않아요. 단지 병마용갱은 절대 진시황의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뿐입니다.

 

끝으로 아래 링크는 영어 사이트인데 병마용갱에 대한 10대 의문점을 묶어 놨습니다. 좀더 궁금한 분들은 참고해주십시오. 링크의 결론은 병마용갱이 진시황의 것이라고 결론 내고 있지만 진시황의 것이라고 내세우는 근거가 너무 빈약합니다. 아무튼 참고만 해주세요.

 

https://www.travelchinaguide.com/attraction/shaanxi/xian/terra_cotta_army/who-is-the-owner.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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