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진시황을 폭군으로 묘사하는 방편으로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년 수십만명을 동원해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아주 흔하게 쓰는 표현이죠. 하지만 정말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만들었을까요?
많은 분들이 현대의 만리장성을 보고 와 진시황이 2천년전에 이런 것을 만들었으니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었겠냐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만리장성은 진시황때의 만리장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만리장성은 진나라 이전의 시대부터 있어 왔고 그 이후에 여러 왕조를 거쳐 증축되고 개보수되다가 명나라때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됩니다. 만리 정도로요. 물론 완성한 것은 아니었죠. 명나라가 망하면서 증축은 중단된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명나라 이후인 청나라나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을 증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만리장성은 그 이후 근대 중국에서도 개보수를 많이 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된 것입니다.
진시황은 13세에 진나라의 왕이 되어 40세에 중국을 통일하였고 51세에 사망합니다. 통일 진나라의 황제로는 약 11년정도 통치를 합니다. 11년정도의 통치기간동안 만리장성을 만들었을 수가 있을까요? 전생을 다 바쳐도 50년정도인데 이 기간에 만리인 5000km의 성을 쌓을수 있을까요?
물론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제위 기간동안에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아닙니다. 증축도 하고 개보수도 했겠지만요. 그때의 장성은 지금의 장성과는 차이가 많았습니다. 규모나 지어진 형태적으로요.
사기에 보면 몽염 장군이 통일 후 병사 30만명을 이끌고 장성을 1만리를 쌓았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현재의 만리장성이라고 와전되어 전해오는 것 같습니다.
진나라가 통일을 하고 나서 가장 큰 적은 북쪽의 흉노였고 흉노를 막기 위해서 장성은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이것이 현재의 만리장성은 아닌것이죠.
사기를 쓴 사마천의 한나라 조차도 흉노를 막기 위해 장성 축조에 공을 들인것을 보면 국가적으로는 굉장히 필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한나라의 고조인 유방이 흉노와의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굴욕적인 화친을 맺은 것만 봐도 흉노는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므로 장성은 꼭 필요했을 것입니다.
사기에는 곳곳에 장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몇가지를 발췌해 보았습니다.
"33년, 병역이나 노역을 피해서 도망간 사람, 가난하여 데릴사위가 된 사람, 장사꾼들을 징발하여 육량(陸梁) 지역을 공격하여 계림군(桂林郡), 상군(象郡), 남해(南海郡)을 설치하고 죄인들을 보내 지키도록 했다. 서북쪽의 흉노를 쫓아버리니 유중(楡中)에서 황하 동쪽 음산(陰山)에 이르기까지 44개의 현을 설치하고, 황하 가장자리를 따라 장성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또 몽염에게 황하를 건너 고궐(高闕), 양산(陽山), 북가(北假) 일대를 빼앗고 요새를 쌓아서 융인(戎人)을 몰아내게 했다. 유배된 사람들을 이주시켜 새로 설치한 현을 충실하게 하되 제사는 금지시켰다"
"34년, 부정한 관리들을 장성을 쌓거나 남월로 내쫓는 벌을 내렸다."
"명령이 떨어지고 30일이 지났는데도 서적을 태우지 않는 자는 경형(黥刑)을 가한 다음 장성 쌓는 곳으로 보내십시오"
"이어 몽염에게는 북쪽에 장성을 쌓아 변방을 지키게 하여 흉노를 7백여 리 밖으로 몰아내니 오랑캐가 감히 남쪽으로 내려와서 말을 방목하지 못했고, 병사들은 감히 활을 당겨 원한을 갚으려 들지 못했다."
"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하자 이에 몽염에게 3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융적(戎狄)을 쫓아내게 하여 황하 남쪽 땅을 점거했다. 장성을 쌓으며 지형에 따라서 험난한 요새를 만들었으며, 서쪽 임조(臨洮)에서 동쪽 요동(遼東)까지 길이가 일만여 리를 뻗어갔다.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을 거점으로 하여 구불구불 북쪽으로 이어갔다. 비바람을 맞으며 외지를 10여 년간 전전하다 상군(上郡)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 몽염의 위세가 흉노(匈奴)에 떨쳤다."
사기 곳곳에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어떻게 쌓았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진 않습니다. 다만 그 시대 백성들에게는 힘든 노역이었던 것만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학자들은 흙으로 쌓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결국 장성은 북방의 흉노를 막기위한 공사였는데 이런 공사를 백성들이 싫어했을 수는 있지만 이런 장성이 없으면 국경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공사였습니다.
흉노는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협적이며 가장 무섭고 큰 적이었습니다. 중국의 모든 왕조가 만리장성을 지속적으로 증축하고 개보수한 이유가 있습니다.
참고로 만리장성이 우주에서도 보인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완전히 개뻥입니다. 인공위성이나 달에서 봐도 보일 정도로 크다라고 누군가 말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와전 된 것입니다. 실제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거짓말에 속지 맙시다.
만리장성하면 "진승,오광의 난"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만리장성을 쌓는 노역을 가다가 비가 내려 기한에 도착하지 못하게 되었고 어차피 가면 죽을거 나도 왕이 되어 보자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이죠.
이 난이 진시황의 폭정에 항거한 농민 반란으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은데 진승 오광의 난은 기원전 209년에 일어납니다. 진시황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2세인 호해가 왕위에 오른 후였죠.
이 호해란 놈이 정치를 개판으로 하는 바람에 그 욕을 진시황이 대신 먹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분명한 것은 진승 오광의 난은 진시황의 폭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더 첨언하자면 사기에는 진승의 반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7월, 수자리에 가던 진승(陳勝) 등이 옛 형(荊) 지역서 반란을 일으켜서 (나라 이름을) ‘장초(張楚)’라 했다."
만리장성을 쌓는 노역을 가던 게 아니고 "수자리"에 가고 있었다는 것이죠. "수자리"는 요즘으로 치면 국방의 의무입니다. 국경으로 나라를 지키러 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승은 만리장성의 노역이 싫었던게 아니고 군대 가기 싫어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물론 군대를 갔으면 장성을 쌓았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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