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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이 만리장성, 병마용갱, 아방궁등의 거대 토목 사업을 벌이면서 백성들을 착취했다 머 그런 얘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특히 아방궁은 현재도 각종 유튜브나 서적, 심지어 방송에서도 자주 언급되곤 하는데 대부분 화려한 건물, 쓸데없이 돈 쓴 건물, 향락, 퇴폐등등과 연관지어지곤 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것은 뭐니뭐니해도 노무현 대통령의 사저를 아방궁이라면서 연일 까내리던 수많은 언론들이 생각납니다.

이처럼 아방궁은 뭔가 진시황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자기 자신의 향락을 즐겼으며 나쁜 왕이었다, 나쁜 지도자였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시황은 정말 아방궁을 환락의 궁전으로 지으려고 했을까요?

 아방궁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 나오는 내용인데 사마천은 진나라의 뒤를 이은 한나라 사람입니다. 진나라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쓰진 않았겠죠.

심지어 사기에도 진시황이 아방궁에서 수많은 궁녀들에 둘러 쌓여 흥청망청 놀았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살아있을때는 다 짓지도 못한다고 나오죠.

 

진시황이 죽고 나서 호해가 왕이 된 후 선제의 뜻을 받들어 계속 궁을 지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또 사마천도 사기에서 호화로운 궁전을 지은게 아니고 함양궁이 좁아서 더 큰 궁이 필요해 아방궁을 지었다고 썼습니다.

 

통일 진나라는 진나라보다 훨씬 영토도 크고 또 이전과 달리 중앙집권적인 성격의 나라로 바뀌었기때문에 관청도 이전보다 훨신 늘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함양궁은 통일 진나라에서는 작게 느껴졌겠죠.

 

그렇다고 아방궁이 일반인들이 아는 것처럼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는 아니었습니다. 사기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동서로 약 1000m 남북으로 약 150m 정도의 크기입니다. 자금성의 크기가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 이니 자금성보다 크기가 작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진시황이 쓸데없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화려한 궁전을 지었다고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사기에 나오는 아방궁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35년, 도로를 닦았는데 구원(九原)을 지나 운양(雲陽)까지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곧장 통하게 했다. 이때 시황은 함양에는 사람이 많지만 선왕의 궁전이 작다고 여겨서 '내가 듣기에 주 문왕은 풍(豐)에, 무왕은 호(鎬)에 도읍했다고 하니, 풍과 호 사이가 제왕의 도읍이다'라고 했다.

 

이에 위수 남쪽 상림원(上林苑)에 궁전을 지었다. 먼저 아방(阿房)에 전반부 건축물인 전전(前殿)을 지었는데, 동서 너비 5백 보에 남북 길이가 50장이었다. 그 위로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로는 5장 길이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그 둘레로 전각을 둘러 궁전 아래에서 남산까지 통하게 했다. 남산 꼭대기에는 궐루를 세워 표지로 삼았다. 구름다리 모양의 복도를 만들었는데 아방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북극성과 각도성(閣道星)이 은하수를 건너 영실성(營室星)까지 이르는 모양을 나타냈다.

 

아방의 궁전이 완성되지 못했다. 완성된 다음에 좋은 이름을 지으려 하였으나 아방에 궁전을 지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아방궁이라고 불렀다. 궁형과 유배형을 받은 죄수 70여 만 명을 나누어 아방궁을 짓게 하거나 여산의 무덤을 조성하게 했다. 북산에서 석재를 캐내고 촉과 형(초) 지역에서 목재를 모두 이곳으로 날랐다. "

 

이것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방궁은 함양궁이 좁아서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둘째. 아방궁은 완성하지 못했다.

셋째. 아방궁이나 황릉을 지은것은 일반 백성이 아니라 죄수였다.

넷째. 70여만명도 아방궁에 모두 투입한것이 아니고 진시황릉과 나눠 일했다.

다섯째. 여기에도 병마용갱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또 2세때에 다시 지었다는 이야기도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4월, 2세가 함양으로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선제께서 함양의 조정이 좁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아방궁을 경영하셨다. 궁실이 완성되기 전에 주상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통에 공사를 그만두고 여산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었다. 여산의 일이 모두 끝났는데 아방궁 공사를 하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은 선제께서 벌이신 일을 잘못이라고 알리는 것이 된다.' 다시 아방궁을 짓기 시작했다."

 

역시 진시황이 짓다가 다 못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함양성이 좁아서 아방궁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마용갱에 대한 이야기도 여전히 나오지 않죠.

 

물론 호해가 아방궁을 지어서 문제가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관동지방에서 도적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 진은 병사를 징발하여 토벌하여 아주 많은 수를 죽였습니다만 아직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도적이 많은 것은 수자리, 수상운송, 토목건축 등 노역이 너무 힘들고 세금이 많기 때문입니다. 청하옵건대 아방궁 축조를 멈추고 사방 변경의 수자리와 물자 수송을 줄이십시오.”

 

결국 나쁜놈은 진시황이 아니라 호해였던 것일까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통치한 기간이 11년인데 11년동안 전국 순시를 다섯 차례 나갑니다. 사망한것도 마지막 순시였던 5차 순시중에 사망하죠. 갑자기 사망한것인데 늘 몸이 안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불로초에 더 집착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방궁을 지어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려고 했던 진시황이 아방궁이 아직 안지어졌으니 그 전까진 열심히 일해야지 하면서 일만 했던걸까요?

그리고 항우가 아방궁을 태웠다고 하는데(나무위키인지 머시기에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기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궁을 태웠는데 그게 석달이상 탔다고 나오지 아방궁을 태웠다는 말은 나오지 않죠. 아마도 함양궁을 태운거겠죠. 그래서 진나라 기록이 다 없어집니다.

 

"며칠 뒤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서진하여 함양을 도륙하고 항복한 진나라의 왕 자영(子嬰)을 죽였으며, 진나라의 궁실을 불태웠는데 불은 석 달 동안 꺼지지 않았다. 진나라의 재물, 보석, 부녀자를 약탈하여 동쪽으로 향했다." - 항우본기

 

항우가 정말 나쁜놈인데 함양궁을 태운 것 뿐만아니라 함양궁을 점령하기 전에 진나라 군사들을 20만명정도 생매장하여 죽입니다. 이런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않죠.

 

"항우는 경포와 포장군을 불러 논의하여 말했다.


'진나라의 장졸들이 아직 수가 많은데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으니 관중에 이르도록 말을 듣지 않으면 일이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하니 이들을 죽이고 장한, 장사 사마흔, 도위 동예만 데리고 진나라로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하여 초나라 군사들은 밤에 공격하여 진나라의 사병 20여 만 명을 신안성 남쪽에 생매장했다." - 항우본기

 

최근 중국의 학자들이(물론 중국 고고학자들의 말을 무조건 믿는건 아닙니다만.) 아방궁의 실체를 찾기 위해 몇년간 아방궁의 터를 찾아 나선 적이 있습니다만 결론은 아방궁은 존재하지 않았다는것입니다. 

아방궁의 아방이 가까운 지역이라는 뜻인데 함양궁 근처의 넓은 지역을 면밀히 조사했는데 그렇게 큰 규모의 성을 지을려면 엄청난 크기의 땅을 다져야하는데 그런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큰 터를 찾기는 했는데 그것이 아방궁의 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거기서 나온 유물이 진나라의 것이 아니었기때문이죠.

 

그래서 결론은 아방궁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것이 최근 중국의 고고학자들의 발표입니다. 심지어 이 내용이 우리나라 뉴스에도 방송됐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나 심지어 언론, 방송에서조차도 진시황의 아방궁이 거론되곤 합니다. 물론 나쁜쪽으로죠.

 

이런 잘못된 내용은 한번 전파되면 제대로 잡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공부를 해서 진실을 알아야 하지 거짓을 퍼트린 사람들은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죠.

 

항상 미디어의 말에 의문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방궁이 정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들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진시황이 아방궁을 지어서 향락을 즐기거나 백성들의 고혈을 빨았다거나 백성들을 과중한 부역에 내몰았다거나 이런 얘기들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방궁에 대한 내용이 잘 못 알려진데는 당나라의 시인이었던 두목의 "아방궁부"라는 시가 한 몫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것들이 확대 재생산 되는 것이죠. 또한 그런것을 앞뒤 확인하지 않고 퍼나르는 수많은 미디어들의 탓도 크겠죠. (두목의 아방궁부 참조 https://programmerdaddy.tistory.com/391)

 

아무튼 아방궁은 새로운 통일 진나라를 위해 필요한 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궁을 짓는 것으로 욕을 먹어야한다면 중국 역사에서 수많은 천도와 수많은 궁을 짓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런 왕들이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고 욕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진시황만 욕을 먹는 걸까요? 진시황이 이 사실을 안다면 관에서 벌떡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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